2019년 4월 11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재판관 9명이 자리를 잡았다. 그날의 결정은 짧고 명확했다. "형법 제269조 제1항(낙태죄)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 방청석에서 눈물을 쏟는 여성들이 있었고, 강하게 항의하는 종교단체 관계자들도 있었다.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국회가 새 법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4월 11일이다. 그 날로부터 정확히 7년이 지났다. 입법 시한은 5년 전에 지났다. 하지만 국회에서 새 법은 아직 통과되지 않았다. 낙태죄는 없어졌으나, 임신중지를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받을 수 있는지를 규정한 법도 없다. 이 나라에서 임신중지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 아무것도 아닌 상태다.
대한민국 낙태죄 70년사: 왜 이 법이 문제였나
낙태죄의 역사는 1953년 형법 제정으로 시작된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하면 최대 1년 징역, 수술을 도운 의사는 최대 2년 징역을 받는 조항이었다. 예외는 오직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특정 유전질환, 산모의 건강 위협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뿐이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 법은 여성의 몸에 국가의 의지를 각인했다.
2010년 헌재는 처음으로 낙태죄의 합헌을 선언했다. 그러나 9년 뒤인 2019년, 헌재는 입장을 뒤집었다. 재판관 4명이 "단순위헌", 3명이 "헌법불합치", 2명이 "합헌"을 주장했고, 위헌 의견 합산 7표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핵심 논리는 하나였다.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이며, 국가가 이를 처벌로 강제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5년 전에 지난 '입법 시한' —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헌재가 권고한 입법 시한인 2020년 12월 31일이 지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자동으로 효력을 잃었다. 임신중지 자체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어떻게 임신중지를 받을 수 있는가'를 규정하는 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간극이 바로 '입법 공백'이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현재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음에도 국회가 손보지 않은 법률은 총 27건에 달한다. 낙태 관련법은 그 중 가장 오래된 미해결 사안 가운데 하나다. 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돼 있지만, 7년째 본회의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 낙태죄 입법 공백 7년 타임라인
대부분의 기사가 말하지 않는 것: '부르는 게 값'인 수술비와 지하 약물 시장
많은 언론이 "입법 공백"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그 공백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다루지 않는다. 기자들이 직접 확인한 현실은 훨씬 충격적이다.
SBS 탐사보도 팀이 임신 30주 산모로 위장해 수도권 병원 수십 곳에 전화를 돌렸을 때, 여러 병원이 환자의 옷차림과 지역 전화번호만 보고 수술비를 달리 불렀다. 같은 임신 주수(30주)인데도 740만 원을 받는 병원이 있는가 하면, 2,800만 원을 요구한 곳도 있었다. 기준이 없으니 법의 보호도 없고, 가격도 없다.
"법이 없다는 건 병원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돈 없는 여성은 선택지가 없어요." — 임신중지 경험자 대상 설문 응답 중 (시사IN, 2024)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해외에서는 의사 처방 하에 안전하게 쓰이는 임신중지 약물 '미프진(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이 한국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미승인 상태다. 이 약은 SNS와 해외직구 플랫폼을 통해 음성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 임신중지 약물 불법 판매 적발 건수 추이 (2021~2025)
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 연도별 집계. 2021~2025년 합계 2,641건 적발.
비공식 경로로 약물을 구매한 경우, 산부인과 처방을 받은 경우보다 임신중지 실패율이 2~3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실패 후 부작용으로 응급실을 찾은 여성들은 "불법 약물을 먹었다"는 말을 의료진에게 꺼내기도 어렵다. 법의 공백이 의료 사각지대를 낳고, 그 사각지대가 다시 생명을 위협하는 악순환이다.
세계는 어떻게 하고 있나 — 한국만 홀로 뒤처진 이유
🌍 국가별 임신중지 법제도 비교
| 국가 | 현행 법제도 | 허용 주수 기준 | 건강보험 |
|---|---|---|---|
| 프랑스 | 헌법에 낙태권 명시 (2024) | 임신 14주까지 | 전액 보장 |
| 독일 | 상담 후 합법 | 임신 12주까지 | 취약계층 지원 |
| 일본 | 배우자 동의 필요 (문제 지적) | 임신 22주까지 | 비급여 |
| 미국 | 주별 상이, 다수 주 금지 | 주에 따라 다름 | 대부분 비급여 |
| 대한민국 | 법 자체가 없음 (회색지대) | 기준 없음 | 비급여·불가 |
프랑스는 2024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는 여성의 권리"임을 명시했다.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임신 초기 낙태를 합법으로 허용하고 공적 의료체계 안에서 지원한다. 한국은 낙태죄를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다음 단계를 7년째 가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2023년 미페프리스톤 경구약이 승인됐다.
나는 어떻게 영향받나 — 연령·처지별 현실
임신중지 결정 후 시술 병원을 찾아 수십 곳에 전화해야 한다. 비용은 150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제각각. 건강보험 적용 없음.
법적 기준이 없어 "시술해도 되는지"가 불분명하다. 분쟁 시 법적 보호 없음. 대형 병원들은 시술 자체를 기피하는 추세.
고액 수술비를 낼 여력이 없어 불법 약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부작용 발생 시 의료 접근도 꺼려진다.
태아 기형 등 의학적 사유로 임신중지가 필요한 경우에도 법적 보호가 불분명해 정신적 부담이 가중된다.
이제 어떻게 될까 — 전망과 독자가 할 수 있는 것
이재명 정부는 임신중지 법제도 마련과 경구 약물 도입을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주문하고 있으며, 식약처는 미소프로스톨 단독 처방 허용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복지위에 계류된 여러 개정안은 허용 주수(10주 대 24주), 사유 제한 방식 등에서 이견이 크다.
여성단체들은 "7년째 같은 말을 듣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국회가 입법을 더 미룰수록 그 대가는 가장 취약한 여성들이 치르게 된다. 경향신문 사설은 11일 "국회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직격했다.
📢 독자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작성일: 2026년 4월 11일 | 카테고리: 🏛️ 정치·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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